두 사람의 장례를 기억하며

2010년 4월 6일과 2011년 4월 6일….

나에게는 귀중한 두분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아버지 품에 안긴 날이다.

작년에는 친할머니가 소천하셨고 올해는 아리문츠 선교사님이시다. 그렇다 할머니는 소천하신지 1년이 지났고 어제부터 나는 아리문츠 선교사님 첫 위로예배 설교를 맡았다. 그리고 하목사님의 위로예배 그리고 저녁에 선교부 주관의 위로예배. 그리고 그 막간의 사이에 할머니 추모 1주기 예배를 드렸다. 어제 하루는 참으로 많은 위로예배를 드린 하루였다.

한 사람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 그리고 한 사람이 죽음으로 정말 많은 것을 산자들에게 남길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최근까지도 용인에 있는 노인요양센터에 설교를 수요일마다 했는데 그 할머니들의 얼굴 속에서 돌아가신 할머니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그리고 더욱 할머니가 그리워진다. 할머니 살아생전에는 잘 몰랐다. 미안하기도하고 죄송스럽기도하고. 할머니가 손주에게 주셨던 그 사랑이 죽음을 통해서 더 진하게 살아난다. 한 영혼 한 영혼은 그렇게 귀한 존재인가 보다.

아리문츠 선교사님과는 별로 많은 대화를 나누어보진 못했다. 양지에 있을때 통역을 맡았었다. 두 번정도 그분의 강의를 통역한 적이 있고. 그분과 식사후에 숙소에서 함께 기도하고 마음을 나눈적이 있다. 그분은 참 유머 감각도 있으시고 재미있으셨다. 온누리교회를 참 사랑하셨지만 반대로 온누리교회가 세속화 되고 대형화되는 부분에 대해서 마음 아퍼하셨다. 그리고 나를 위해서도 진심으로 중보해 주셨다. 뇌종양에 걸리셨지만 방사능 치료나 항앙 치료를 거부하며 끝가지 하나님게 매달리셨던 그분.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앞뒤가 막힌 사람 혹은 고집불통 정도로 치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자신의 믿음을 지키고 주님만을 바랐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내 인생의 전환기를 앞둔 시점에서 그분을 만나게 하셨고 그분과의 교제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해주셨다. 그러한 면에서 그분은 나에게 특별한 분이셨다. 그분의 첫번째 위로예배를 내가 인도할 수 있었다는 것도 참 특권이면서 많이 숙연하게 하는 순간이었다.

어저께 한 분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천국을 가깝게 점점 느끼는거 같죠?”락고… 정말 그렇다. 나에게도 남겨진 날들이 얼마나 있을까? 아무도 모른다. 오늘 주어진 하루하루를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한다. 아리문츠 선교사님처럼… 그리고 할머니처럼… 나는 나에게 주신 시간들 안에서 하나님앞에서 예배하고 그분을 섬기고 그분 앞에서 즐기고 교제하고 나누는 삶을 위해서 이 세상에 보내진 것이 아닌가?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가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자.

“내가 간절히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은, 내가 어떤 일에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항상 그랬듯이 지금도 담대하게 원하는 것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위대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 빌립보서 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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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대는 충성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미국의 The Mission Exchange ( 한국으로 치면 복음주의 선교단체 협의회)의 상임총무인 Steve Moore가 최근 발간한 “While You were Micro-sleeping”이라는 책에 보면 신세대가 어떻게 충성의 개념을 이해하는지에 따라 선교단체의 조직과 리더십에 대한 관점이 달라진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기존 세대들은 제도적인 패러다임에서 충성을 이해하고 있다. 제도적인 패러다임은 두가지의 키워드가 있는데 하나는 독점성과 권리부여이다. 조직은 조직원들에게 독점적인 충성을 요구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 조직만의 고유의 역사, 신학, 이데올로기, 행정등이 다른 조직과 다르기때문에 독점적인 충성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장로교 교단의 신학적인 우위, 교단의 행정/재정 규모, 장로교의 한국안에서의 영향력 등으로 교단 멤버들에게 충성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권리부여는 이러한 조직들은 개인들로 하여금 개인보다는 집단이 우선시 되기 때문에 몸의 요구에 먼저 개개인의 권리를 맡기고 헌신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신세대들은 관계적인 패러다임에서 충성을 이해한다. 신세대에게는 다양성과 참여라는 개념에서 충성을 이해한다. 신세대들은 비전을 교감할 수 있고,  그러한 비전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사람들에게 다양한 관점과 기회를 제공하는 리더십을 따른다는 것이다. 다양성과 참여가 이러한 패러다임에서는 중심단어가 된다.

스티브 무어는 이러한 맥락에서 선교단체나 교회 선교부에서 젊은 세대를 동원하기 위한 세가지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1) 우선 듀얼 멤버십의 고려이다. 신세대는 한 단체에 평생을 바쳐서 일하는 것이 결코 하나님 앞에서 충성된 것이 아니라고 본다. 더 다양한 경험과 리더 밑에서 일을 배우고 다양한 사람들과 경험들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더욱 실력과 영성을 가지고 섬길 수 있는 리더가 키워진다고 생각한다.

2) 우리가 생각하는 신학적 관점의 다양화이다. 장로교 신학에서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요소들을 신세대들은 기꺼기 포기할 수 있는 부분들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교리나 교파 혹은 집단의 바운더리를 많이 치면 칠 수록 신세대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까?

3) 중앙집권형 피라미드 권력구조 보다는 팀리더십, 다양한 은사를 지닌 사람들의 협의체를 원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새로운 생각들이 받아들여지며 함께 동역할 수 있는 구조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위의 내용들을 한국 상황에서 대입해 보면 어떨까? 아마 선교단체 뿐만 아니라 한국의 많은 조직들안에서 이러한 변화에 대비한 리더십들이 양성되어야 할 것이다. 무조건 신세대의 리더십에 대한 이해만이 옳고 기존세대의 관점은 틀리다라는 이분법적인 사고 방식은 지양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리더와 팔로워 간의 소통의 존재, 그리고 조직이나 직함으로 오는 제도적인 리더십보다는 관계, 성품, 실력을 통한 실제적인 리더십 등 우리에게 기존 리더십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여러가지 적용점들을 준다는 점에서 그의 아이디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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